나보고 커피를 나르라고?
비가 내린 후 화창하게 갠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남편과 느긋하게 일어나 좋아하는 카페에서 가성비 좋은 모닝 메뉴와 햇살을 즐기려 외출을 서둘렀지요. 강릉으로 내려오며 우리 부부가 자주 찾게 된 카페입니다. 여행객에게도 인기 있는 장소라 손님이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붐비지 않아 전망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었지요. 3층 통창 앞의 바다와 숲이 막힘없이 보이는 자리를 찜하고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했습니다. 언제부터 고객이 직접 주문하고 메뉴를 직접 나르는 시대가 된 걸까요. 우리는 주문한 커피를 받아 3층에 올라가려, 잠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어떤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배식대와 고객 테이블 사이의 계단에서 할머니가 모닝세트 쟁반을 든 채로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께 “여보, 이것 좀 받아줘요. 계단에서 넘어질 거 같아”라며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쓱 쳐다보더니 “그냥 내려와.”라며 퉁명스럽게 말하곤 고개를 숙이는 거였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저는 한마디로 거절 당한 할머니가 얼마나 무안할지 내내 신경이 쓰였지요. 어쨌든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온 할머니는 “이제 당신 것은 당신이 가져와요.”라며 화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 사이에 그렇게 긴장감이 팽팽할 때 음식이 나와 3층으로 올라왔기에, 더 이상 그 신경전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요.
자리에 앉아서도 “아니, 할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질까 겁이 난다는데 쟁반을 받아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배우자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지.”라는 혼잣말을 할 정도로 저는 할아버지가 못마땅했습니다.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저는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요? 가만 생각해 보니 그 할아버지를 보며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떠올라서였습니다.
자신이 지키고 싶은 품위
저희 4남매가 독립 후, 부모님 두 분만 생활한 세월은 길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쇠약해지며 아버지는 평생 하지 않던 설거지는 물론이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사일로 어머니를 도왔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가는 일은 유독 꺼리셔서 어머니가 불편한 몸으로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외출하시면서 쓰레기를 버리면 어머니도 편하고 집안도 바로 깔끔해질 텐데 왜 그러시는지 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훌쩍 우리 곁을 떠나신 후, 아버지가 그래서 그러셨나? 하고 어떤 부분 이해가 됩니다.
어머니가 측은해도 당신이 쓰레기봉투를 드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던 겁니다. 고정된 남녀의 역할 학습을 받으며 성장했던 아버지가 가정에서 쓰레기를 들고 집 밖으로 나서는 게 자존심의 선을 넘는다고 여겼던 거지요. 병세가 악화돼 걷기 힘들 때도 아버지는 병원에서 휠체어를 사용했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선 휠체어를 타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아는 사람에게 병자 모습을 보이기 싫은, 즉 품위를 지키려 애쓰신 거지요. 그때 저는 아버지가 행여 넘어질까 불안해, 그런 상황에서도 체면이 그렇듯 중요한가 싶어 속상했습니다.
노쇠해지는 몸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드셨을 아버지, 그 심정을 위로조차 못 해드렸던 그때의 ‘마음 어린’ 저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버진 쓰레기를 들고 있어도 여전히 멋있는 분이예요.”라고 말해 드리라고 알려 줄 텐데, 못내 아쉽습니다. 한 번이라도 말없이 다가가 손을 잡아 드리거나 그 마음을 안다는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봐 드렸다면 아버지도, 그때를 회상하는 저의 이 시간도 따뜻할 수 있었겠지요. 아버지를 회상하다 보니 카페에서 뵈었던 할아버지도 아버지가 쓰레기봉투를 선뜻 들지 못했듯, 평소 하던 일이 아니라서 쟁반을 받아주는 게 어려웠겠다는 짐작이 됩니다. 체면이 중요한 할아버지가 사람 많은 그곳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을지도요.
누구나 지키고 싶은 나름의 품위가 있듯 저 또한 지키고 싶은 저만의 품위가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며, 남들에게 괜찮은 노인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유연해지려 애써도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아, 진짜 노인들은 왜 저러는 거야.’라고 답답한 부분이 있겠지요. 수용성 넓은 품위를 지닌 노년을 맞으려면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변화된 시대에 발맞추려는 시도,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변화는 두려움이 아니라 조물주께서 새롭게 일하시는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좀 더 유연하게 수용할 줄 아는 마음을 키우고 싶습니다.
알라딘 1층 강연장에서 16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있을 북토크에서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K People Focus 김수경 칼럼니스트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치유코칭백일쓰기 강사
출간 『저무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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